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9 혁명/진행 (문단 편집) === 계엄령과 계엄군의 태도 === 사태가 워낙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당일 '''오후 3시''' 서울 일대에 긴급히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때 총격 사망 문제를 덮기 위해 '''1시로 소급하여 적용하였다'''. 계엄령은 [[서울특별시|서울]], [[부산광역시|부산]], [[광주광역시|광주]], [[대전광역시|대전]], [[대구광역시|대구]], [[전주시|전주]], [[청주시|청주]], [[수원시|수원]] 일대에 선포되었다. 이로써 시위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고'''[* 다만 일부 세력이 지금까지의 불만과 혼란스러운 틈을 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박정희]]는 육사생도들을 모아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밝혀진 바로는 이게 박정희의 첫 쿠데타 모의이며, 이후 4.19 혁명 1주년 행사때 다시 쿠데타 모의를 했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5.16 군사정변]] 때 성공했다. 계엄군으로 위장한 일부 군인들이 경무대에 잠입해 이승만을 끌어내리고 쿠데타를 하겠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종찬]] 육군대학 총장이 있었기에 이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박정희는 명망 높은 군인이였던 이종찬 총장을 설득해 후에 일어날 구설들을 막기 위한 바람잡이로 기용할 생각이었으나 이종찬 총장은 군이 시위진압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쿠데타에 이용되는 것도 반대했기에 박정희의 쿠데타는 무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위가 있어도 발포를 하지 않았고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서울에 계엄군이 진주하자 어느 노신사가 계엄군에게 "우리를 죽이려고 왔는가? 죽이고 싶다면 얼른 죽여라!"라고 울부짖었고 이에 지휘관이었던 젊은 장교가 [[동남 방언|경상도 사투리]]로 "같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우째 총부리를 들이댈수 있는교? 만약 위에서 시위대를 쏘라고 지시하면 우리는 아스팔트 바닥을 쏘고 말깁니더" 라고 대답하자 시위대는 군대가 시민의 편이라고 환호하고 군인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계엄군이 경찰들처럼 강경하게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군부 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이승만이 [[경찰]] 세력을 비호하는 한편 독재 연장에 공헌을 한 적이 있는 군부에게 보상을 제대로 내려주지 않았다는 점. 당시의 경찰은 내무치안 조직이라기보다는 공비 토벌 등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사실상 [[준군사조직]]에 가까웠으며[* 이러한 준군사조직화가 얼마나 심했냐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는 연속적으로 일어난 군 내부 반란 사건과 프래깅으로 인해 경찰에 무장이 집중되면서 당시 최신화기인 M1개런드 소총, M2카빈 소총 등 개인화기는 육군보다 더 많았다고 알려지며 후에 이러한 무장의 분산이 오히려 6.25 때 무기부족으로 최전선이 어이없게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심지어는 기관총인 M1919를 보유하였다는 기록도 있었다. 오죽하면 미군과 빨치산 토벌을 갔다가 무장이 너무 좋아 미군이 위장한 빨치산인 줄 알고 서로 교전한 기록도 있다. 심지어 한국전쟁때는 국군이 북한군에 밀려 패주하는데 경찰들이 방어선을 틀어막는 어이없는 일까지 일어났다.] 국내의 '무력 조직'으로서 경찰과 군의 라이벌 의식은 상당히 강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1957년경 사망한 경찰 초대 총경 [[차일혁]]은 무정부주의 성향에 가까웠다.] *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국방부 장관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 당시 서울 지역 계엄을 담당했던 부대는 15사단 ([[사단장]] [[조재미]] [[준장]])으로 자체적으로 이하와 같은 세 가지의 원칙을 엄정히 지킬 것을 각급 부대에 지시한 바 있다. *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시위대는 점차 진압되기 시작했다. 잔혹한 유혈진압을 서슴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우고 압박해 오는 계엄군 앞에 시위대는 쫓기고 쫓기기를 거듭했다.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닥치는 대로 징발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완강하던 시위대도 맨주먹으로는 더 이상 일제 사격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면서 도심지에서 점점 밀려났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눈에 띄는 차량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해 차에 올라타고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한 채 길을 누볐다. 오후 6시 40분경 소방차와 트럭 등에 분승한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 앞을 지날 때 경찰서 안에서 발포해 다시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동화한 시위대는 밤 8시 경 40여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질렀으며 파출소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 27정으로 무장해 한때는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시위대 일부는 20여대의 차량에 분승해 미아리 쪽으로 퇴각하여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0200209204008|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0400209204010|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 쪽으로 몰렸다.]][* [[김정남(1942)|김정남]], '4.19 혁명', 2003, 84페이지.] 시위대는 결국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때의 에피소드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극적인 사건이다.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이대로 곧장 밀고 들어갔다가는 양쪽 모두 최악의 참사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 자명한 일. 이때 놀랍게도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 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했고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서 즐비하게 놓인 수많은 희생자들의 태극기로 덮인 시신들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 당혹감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던 시위대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해 계엄군에 연행됨으로써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